휘문고는 어떻게 조선 최초로 고시엔에 진출했나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8.08.0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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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엔과 조선야구 역사> 시리즈

1회: 1923년 휘문고는 고시엔에 갔었다

2회: '일선융화'에 활용된 고시엔 조선 예선

3회: 휘문고는 어떻게 조선 최초로 고시엔에 진출했나

4회: 휘문, 대만 다롄상업과 고시엔서 첫 대결, 그 결과는?

5회: 휘문고, 동맹휴학으로 1924년 고시엔 예선 출전 못하다

이제 1923년 휘문고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1923년 7월 24일 경성중학 야구장에서 열린 고시엔대회 조선예선에는 모두 8개교가 참여했다. 휘문고보는 유일한 조선인 학교였다.

고시엔대회 출전을 희망했던 학교는 휘문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시엔대회 창설 2년째 해인 1916년 중앙기독교청년회(WMCA) 야구단이 처음 도전장을 냈다. 주최사인 오사카 아사히신문이 조선 예선을 공개 제안한 시점이었다. 중앙기청은 7월 일본인 학교 경성중학과 경기를 벌여 15-2 대승을 거두며 실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고시엔 대회 출전은 무산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한 <한국야구사>에는 그 이유를 “주최측의 거부”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류다. 거부의 주체는 주최측이 아닌 조선총독부였다. 지난 회에서 소개했듯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조선예선 대회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1923년 열린 제4회 전조선야구대회 중등부에서 우승한 휘문고보 선수단. 출처: 대한체육회

휘문은 조선예선 참가에 앞서 5월 배재운동장에서 열린 제4회 전조선야구대회 학생부 우승팀이었다. 준결승을 겸한 첫 경기에서 홈 그라운드 이점을 안고 있던 배재고보를 만났다. 당시 배재고보 운동장은 조선인 학교 가운데는 가장 좋은 야구장 시설이었다. 그래서 1회 전조선야구대회도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렸다. 배재는 1, 3회 대회에 우승한 당대 최강팀으로 꼽혔다. 2회 대회에선 앞서 열린 학생 대회에서 배재 응원단이 폭력 사태를 일으켜 출전 자체가 금지됐다.

배재는 4회 대회를 앞두고 대구 계성학교에서 이영민과 백기주를 영입하며 전력이 더욱 강해졌다. 굳이 따지자면 ‘한국 야구 스카우트 1호’다. 하지만 두 선수 뿐 아니라 축구부, 음악부 학생까지 20여 명이 단체로 배재에 입학했다. 계성에서 운동과 음악을 가르치던 교사 김태술이 미국 유학을 앞두고 제자들을 환경이 나은 서울 학교로 전학시켰다.

1934년 일본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팀과 전 일본 선발팀 경기에 출천한 이영민(오른쪽). 왼쪽은 메이저리그 베이브 루스다.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다. ⓒwikimedia

 

이영민은 일제 시대 최대 스포츠 스타로 꼽힌다. 1928년 연희전문 재학 시절 경성운동장(동대문구장) 1호 홈런을 친 슬러거였다. 1934년엔 요미우리신문이 주최한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포함된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초청 경기에 전일본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지금 고교야구 최우수 타자에게 시상하는 이영민상의 그의 이름을 땄다. 백기주는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한 뒤 평양 지역 사회인 야구를 대표하는 투수 겸 외야수였다. 160cm 단신이었지만 배재고보 재학 시절 육상 스타로도 이름을 날렸다.

원래 두 선수는 휘문에 입학할 뻔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펴낸 <질레트에서 이영민까지>에는 백기주의 회상이 이렇게 소개된다.

“내가 서울로 애당초 전학하기로 했던 학교는 휘문이었지요. 김태술 선생님이 먼저 교섭한 데가 그 학교였거든요. 휘문은 돈이 많은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휘문은 ‘이영민과 백기주만 받겠다. 나머지 사람들은 필요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앞날을 책임진 김태술 선생님으로서는 그건 안될 말이지요. 그렇게는 할 수 업다고 생각한 김 선생님이 배재 마춘식 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더니 전부 다 받겠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돼서 20여 명이 모두 배재로 들어간 거지요. 배재는 맨 운동선수들만 있고 음악부원은 없었다가 처음 생기게 됐습니다.”

 

하지만 배재는 첫 경기에서 휘문에 0-4로 완패했다. 백기주의 경우 4월에 전학했는데 당장 새 팀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세가 오른 휘문은 결승에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보를 14-3으로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다음 목표를 고시엔으로 삼았다.

아사히신문 계열사인 아사히스포츠는 1923년 7월 조선예선 직전에 발간한 신문에서 휘문을 이렇게 소개했다. “전국 중등학교에 이제 손색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번 조선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 팀이 될 것”

이 해 조선예선 기간은 단 4일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팀의 숙식 경비를 해결하기 위해 대회 기간을 줄여야 했다. 대회 방식은 8개 팀 단판 토너먼트였다. 다른 학교에도 일부 조선인이 포함돼 있었지만 전원 조선인 팀은 휘문이 유일했다. 휘문은 1회전에서 인천상업을 6-1로 누르고 4강에 진출했고, 4강에서 용산중학을 5-1로 눌렀다.

7월 27일 열린 결승에선 전 대회 우승 팀 경성중학을 10-1로 대파했다. 1회초부터 2점을 선취한 뒤 6회까지 8-0으로 일방적으로 앞서나갔다. 4번 타자를 겸한 투수 김종세는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성중 타선을 9이닝 동안 삼진 11개를 잡아내며 3피안타 1실점으로 압도했다. 이 경기 휘문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1번 유격수 민병길 2번 좌익수 이경구 3번 포수 김정식 4번 투수 김종세 5번 3루수 왕명구 6번 2루수 심운영 7번 중견수 유재춘 8번 1루수 김종윤 9번 우익수 이순재.

 

1923년 7월 31일자 오사카 아사히신문 조선판은 휘문의 우승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조선인 학교가 우승하고 국내 동서 각지의 우승 학교와 쟁패전에 참가하는 것은 조선(통치)문제를 윗선에서 보기에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일본과 조선)화합의 윗선에서 바라본, 휘문이 나루오 구장의 본 무대에서 사투하는 일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

 

1924년 휘문고보 야구단은 오사카 중학 야구단과의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가운데는 박석윤 감독. 간송 전형필도 휘문고보 야구선수였다. 이 사진은 2018년 4월 경매에 부쳐졌다.

고시엔 출전권을 따낸 휘문은 8월 9일 경성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탄다. 경부선철도 부산잔교역과 산요본선 시모노세키역을 잇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나는 일정이었을 것이다. 부산에서 휘문고의 감독은 오사카 아사히 신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을 대표할 조선인의 팀으로 전국중등학교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조선 사람들은 물론 우리 선수들도 매우 기뻐하고 있다. 승패는 하늘에 맡기고 남자답게 조선 청년의 의기를 백만 관중에 보여주고 싶다“

그의 이름은 박석윤이다. 전남 순천의 갑부집 자제로 태어나 일제 시대 일본, 영국, 만주, 폴란드, 하와이를 돌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하와이에선 동포들의 손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5명 명단에 그를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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