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조르게와 코헨, 조국을 구하고 처형당하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08.2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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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이 화제다. 한국 정보기관원이 치밀한 공작을 거쳐 북한 측의 신뢰를 얻고, 북한의 최고위층과도 접촉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떠들썩한 액션과 불꽃 튀는 총격전 없이 ‘구강 액션’만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데 웬만큼 성공한 듯 하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대목이 있으니 확언은 할 수 없으나 흑금성 박채서는 한국의 정보원, 깨놓고 말하여 ‘간첩’으로는 유일하게 북한의 최고위층에 접근했던 사람이었다. 북한측도 남한의 고위층에 스파이망을 심어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한이 하는 일을 북한이 왜 못하겠는가.

내가 속한 세대는 ‘간첩’이라는 단어에 본능적인 공포감을 지니고 있다.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의 대상이었고 “간첩은 표시 없다 삼천만이 살피자”는 구호의 표적이었으며 “이웃집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고까지 경계하던 간첩 아니겠는가 말이다. 북한에서도 ‘남조선 특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하니 분단된 남과 북은 상대방을 향해 치열하고도 격렬한 첩보전을 전개해 왔다 하겠다.

한국 정보기관인 국정원 현관에는 ‘이름없는 별들’ 열 세 개가 걸려 있다. 해외 활동이나 대북 공작 와중에 희생된 요원들이라고 한다. 원래는 쉰 개가 넘었는데 전임 이병호 국정원장이 재임 중 병사자 등을 제외시키고 실제 작전 중 사망자만 추렸다고 한다. (중앙일보 2018년 7월 28일자) 국정원 요원만이 대북 정보 활동을 벌인 건 아니니 국군 정보 사령부 등을 합치면 그 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한편 미국 정보기관 CIA에도 비슷한 조형물이 있다고 한다. 역시 비밀 공작 와중에 희생된 ‘간첩’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1947년 이래 현재까지 129개. (위 신문) 그런데 2010년과 2012년 사이, 그 벽에는 30여 개의 별이 쏟아지듯 내걸렸을 것이다. CIA의 정보원이자 이중간첩이던 리전청(李振成)이 중국 정보 기관에 CIA 간첩망을 누설하면서 30여 명의 CIA 정보원들이 중국에 체포돼 처형됐던 것이다. (뉴시스, 2018년 8월 17일) 물론 미국 정부가 그 희생자들에 대하여 취한 공식 입장은 “아는 바 없음”이었을 것이고 중국 정부에 항의는 커녕 손 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간첩의 운명이니까.

2018년 7월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을 찾아 업무중 순직한 직원을 기리는 '이름없는 별' 추모석 앞에서 직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2017년 1월 2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CIA 본부 로비에 있는 추모의 벽 앞에서 연설을 했다.

 

3천년 전 중국의 손자가 쓴 손자병법의 마지막 장은 용간(用間), 즉 간첩 사용법이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사의 일 중에서 간첩과의 관계보다 더 비밀스러운 것은 없고, 간첩에게 주는 포상보다 더 후한 상도 없으며, 현명한 이 아니면 간첩을 쓸 수 없고, 인의(仁義)로서만 간첩을 부릴 수 있으며 미묘한 능력이 없으면 첩보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니 간첩을 이용하여 효과를 거둘 수 없다. 그러고 보니 간첩을 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그 뒷 대목에선 소름이 돋는다. “간첩 작전 수행 이전에 기밀이 새 나가면 간첩 및 전해들은 이 모두를 죽인다.”

정보원을 부리는 것도 이렇게 오묘하지만 실제 그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정보원 역시 보통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 일만큼 비밀스러운 일도 없고 머리회전이 빠르지 않으면 어림도 없고, 충성심도 대단해야 하며 순간 순간의 판단력과 임기응변이 얼마나 기민해야 할 것인가. 여차하면 목숨을 잃을 위기까지 감수해야 하는 판이라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울까. 007 시리즈가 괜히 장수하는 게 아니고 ‘본’ 시리즈가 끊임없이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득한 옛날 이야기고 신화에 기까운 서사시의 내용이지만 우리는 ‘트로이의 목마’를 익히 알고 있다. 오딧세우스의 지혜를 상징하는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통해 난공불락의 트로이가 함락되지만 오딧세우스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났어도 한 명의 스파이가 없었다면 트로이는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시논이라는 그리스 병사였다. 10년 동안 혈전을 치르던 그리스군은 갑자기 철수했다. 기쁨 반 의심 반의 트로이군이 그리스군 진영을 찾았을 때 눈에 띈 것은 거대한 목마와 남루한 졸병 하나, 즉 시논이었다. 그는 트로이인에게 목마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트로이에는 팔라디움(Palladium), 아테네 여신이 실수로 죽였던 포세이돈 신의 딸 팔라스의 조각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만 있으면 트로이는 함락되지 않는다던. 그걸 오딧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훔쳐오지 않았겠습니다. 그 때문에 아테네 여신의 노여움을 샀죠. 그래서 저를 산제물로 해서 제사를 지내고 철수하려 했습니다. 저는 막판에 도망쳐 겨우 살아남았죠. 목마는 아테네 여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만든 겁니다.”

“왜 저렇게 크게 만들었나.”

“트로이 성문보다 높게 만든 겁니다. 당신들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또 여러분들이 그리스 인들이 만든 이 목마를 부숴 버리거나 불태우면 아테네 여신의 노여움을 사겠죠. 그것까지 계산하고 만든 겁니다.”

시논의 언변과 연기는 대단했을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 계략의 성공은 사실상 그에게 달려 있었다. 트로이의 공주 캇산드라나 제사장 라오콘처럼 목마를 경계하는 트로이인들을 압도하는 설득력을 지녀야 했고, 어떻게든 트로이인들이 성 안으로 목마를 가지고 들어가게 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결국 스파이 시논은 목표를 달성한다. 트로이인들은 자신들의 성문까지 부숴 가며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일본 첩보를 수집해 소련의 2차세계대전 승리에 기여했던 리하르트 조르게

이렇듯 굵직굵직한 세계사 속, 영웅과 거인(巨人)들이 펼치는 파란만장의 거대한 행보 사이에는 영민하고 유능한, 적들마저 감쪽같이 속여 넘기는 연기력과 인간적 매력까지 겸비한 스파이들의 잰 걸음들이 항상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빈번하게 역사를 바꾸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리하르트 조르게(1895~1944)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제임스 본드, 리하르트 조르게. 사진은 일본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조르게는 철저한 독일인으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젊은이들처럼 군대에 자원하여 자신의 고향인 러시아 군에 맞서서 용감히 싸우다가 세 손가락을 잃는 등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간다. 여기까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용맹한 상등병 아돌프 히틀러의 경험과 유사하다. 하지만 병원에서 만난 한 간호사가 리하르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트라우마에다가 일종의 격세유전 (할아버지가 맑스와 엥겔스의 친구였다) 탓이었을까. 그는 공산주의자였던 간호사의 설득에 완전히 빠져들고 그 이후 자신의 일생을 공산주의자로 보내게 된다. 함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소련으로 가서 코민테른에서 일했던 그가 발군의 능력을 보인 분야는 어학이였다.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적국이나 기타 정보 수집이 필요한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는 것은 스파이로서의 기본 자질을 우수하게 갖췄다는 뜻이다. 소련 정보국 GRU (KGB의 전신)도 이 점을 주목했다. 조르게는 정보원으로 발탁돼 일본으로 파견된다. 독일 언론의 일본 지국 기자의 신분을 가장한 스파이 조르게의 전설적인 활약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독일에 구축한 소련 정보망이 일망타진되면서 정보에 무척이나 목 말랐던 소련에게, 독일과 동맹국이던 일본은 정보의 오아시스였고 조르게는 정력적인 스파이 활동을 통해 소련의 갈증을 풀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파악하여 전달했으나 스탈린은 그를 무시했다. ‘대원수’ 스탈린은 자신의 충직한 스파이보다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더 믿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전면전이 터진 것을 보고받고는 “우리가 독일에게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얼뜨게 묻는 바보가 되고 말았다.

스탈린이 조르게를 믿지 못했던 것은 그가 트로츠키와 부하린 계열의 공산주의자인데다가 혈통적으로 독일인이기 때문이었다. 조르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의 무시무시한 대숙청이 휘몰아치는 소련에서 트로츠키 계열이란 딱지는 곧 사형 대기장과도 같았고 자신의 혈통 또한 언제 머리에 떨어질지 모를 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적은 자신의 조국을 집어삼킨 나찌즘이었고 그 동맹국 일본의 파시즘이었다. 세계 혁명을 꿈꾸던 공산주의자로서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나찌와 파시스트들의 전횡을 가로막을 정보를 캐내 자신을 불신하는 사회주의 조국으로 실어 날랐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보는 일본의 관심은 동남아시아에 있지, 소련과 전쟁을 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조르게의 이 보고서를 믿고서 소련은 만주- 몽고 국경에 배치되어 있던 백만 대군을 독일전에 투입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시베리아 주둔 병력이 신속히 움직이지 않았다면 소련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2차대전의 가장 거대한 전역(戰役)이었던 동부전선에서 소련이 붕괴됐다면 역사는 또 어디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처칠이 상상했던 바 미얀마에서 인도로 쳐들어오는 일본군과 소련령 중앙아시아까지 치고들어간 뒤 인도로 남하한 독일군이 악수를 나누는 상황이 실현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역사의 흐름을 막아섰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리하르트 조르게였다.

1964년에서야 소련은 스파이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했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동전, 우표까지 발행했다.

끝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된 그는 “다 이루었다.”고 한 십자가 위의 예수와 비스무리한 말로 그의 스파이 활동을 마감했다. “일본에서 빼낼 정보는 더 이상 없다.” 방대한 독서량과 일본 주재 독일 대사의 부인까지 유혹할 만큼의 세련된 매력, 그리고 강철 같은 신념과 견결한 태도를 동시에 지녔던, 그래서 일본 검사로부터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찬탄을 하게 했던 스파이는 1944년 11월 7일 사형대에서 그 인생을 마감했다. 일본은 소련에 스파이 교환을 요구했지만 소련의 답은 “그런 사람 모름”이었다. 소련은 1964년, 즉 조르게가 죽은 20년 뒤에야 조르게의 존재와 공로를 인정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탈환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엘리 코헨

조르게는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의 일본 특파원 신분을 썼다. 정보원으로서의 활동은 역사적이라 할 만큼 방대하고 유의미했으되 상대적으로 일본 정보기관의 감시와 경계에서 자유로운 처지에서 활동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소개할 스파이는 조르게도 찬탄해 마지 않을 만큼의 신분 위장을 거쳐 적대국가의 심장부를 타격했던 사람이었다. 엘리 코헨 (1924~1965)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의 스파이.

스파이 엘리 코헨은 시리아에서 국방차관 물망에 올랐다. 사진은 1960년대초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배경으로 찍은 엘리 코헨. 이스라엘 정부가 2018년 공개했다.

그는 이집트 출신의 유태인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 터를 잡았던 그의 가족은 이스라엘 독립 후 점증하는 반 시오니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이집트를 떠나 이스라엘로 들어갔다. 하지만 엘리 코헨은 이스라엘 무장조직 하가나의 일원으로서 이집트에 남아 첩보원 노릇을 했지만 뭐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는 법, 이집트 정보기관에게 덜미를 잡힌다. 풋내기 첩보원이었고 뭘 제대로 훔친 것도 없는지라 이집트 정보기관은 “때려서 놓아 주었고” 엘리 코헨은 목숨을 건져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그때 어느 잔인한 방첩대원에게 걸려 사막의 고혼이라도 되었더라면 엘리 코헨이 역사에 남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들어갔고 고된 훈련을 거쳐 유능한 첩보원으로 거듭난다. 모사드는 그들이 모토로 삼고 있는 구약 성경 잠언 24장 6절,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는 말 그대로 세기의 첩보원 하나를 길러 냈다. 콧수염까지 멋지게 기른 이 이집트 출신의 유태인, 아랍어를 모국어처럼 하는 이 유태인 스파이는 스파이들이 우글거리며 아랍계 이민들의 공동체가 구성돼 있는 아르헨티나로 보내졌고 여기서 시리아 대사관 무관 하페스를 비롯하여 본국에서 쫓겨나 권토중래하고 있는 시리아 바트당원들과도 친교를 맺는다. 그런데 본국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시리아는 바트당 세상이 됐다. 동시에 엘리 코헨의 세상이 열린 것이기도 했다.

모사드는 아낌없는 지원으로 그를 시리아 부호로 만들었고 그는 시리아의 바트당 간부이자 군 장교들에게 아낌없는 엽색 향연을 베푸는 물주로서 시리아 고위층의 절친이 됐고 그 자신이 시리아의 고위층이 됐다. 그의 기억력은 대단해서 골란 고원을 시찰한 후 그 핵심 지형과 기지 위치 등을 고스란히 이스라엘측에 전해 줄 정도였고 임기응변도 뛰어났다. 이를테면 유칼립투스 사건.

그는 골란 고원의 시리아 기지를 둘러보며 이런 제안을 한다. “이런 땡볕에 병사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겠소. 유칼립투스같이 잘 자라는 나무를 심으면 그늘도 있고 좋겠네.” 유칼립투스는 빨리 자라는 나무다. 금새 무성하게 잎을 드리웠고 이스라엘 군은 그 푸른 잎들만 보고 사격을 하면 되는 편리한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어느덧 엘리 코헨은 국방 차관 물망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스파이로서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시리아 정보당국은 정체 모를 라디오 송신이 외국 대사관들의 무선 송수신을 방해한다는 불평을 접수한다. 자신감에 넘쳐서일까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보내던 엘리 코헨 때문이었다. 시리아 정보기관은 눈을 까뒤집고 찾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소련에게 sos를 쳤고 소련 전문가들이 시리아로 들어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못찾겠다, 꾀꼬리. 여기서 소련 전문가들은 하나의 꾀를 낸다. 한 번 도시에 정전을 시켜보자. 그때도 송신하고 있으면 어디 있는지 알거 아니냐 하는 발상이었다. 여기에 그만 코헨이 걸려들고 만다. 정전이 되자 건전지를 끼우고 송신을 계속하던 그 앞에 시리아 정보 장교들이 나타난 것이다.1965년 1월 24일

“엇 이놈은.... 아 그때 유수프를 소개시켜 줬던?” “당신한테도 여자를 소개시켜 줬나?” “이거 아주 계획적이었구나.....” 아니 그 정체불명의 괴송신의 당사자는 자신들에게 여자를 대 주던 그 사람 아닌가. 곧 사실은 일사천리로 밝혀졌다. 그는 스파이였다. 이스라엘은 즉각 시리아 간첩 10명에 추가하여 막대한 선물까지 제시하며 코헨을 돌려받으려 하지만 시리아 군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화려한 밤 문화(?)를 익히 아는 적국의 스파이를 어떻게 돌려 보낼 것인가. 거기다가 국방 차관까지 물망에 오른 이로서 자신들이 모르는 것조차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엘리 코헨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이슬람에게나 유태인에게나 더러운 진승으로 취급되는 돼지 똥 속에 파묻히는 고문을 비롯해서 별의 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얼마 못 가 시리아 국민들이 증오의 야유를 퍼붓는 가운데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시신이라도 돌려 달라고 했지만 상처받은 시리아측은 ‘니들이 이미 훔쳐 갔잖아?“라고 일갈하며 어디론가 아무렇게나 묻어 버려 지금은 시신의 행방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엘리 코헨은 1965년 5월 18일 다마스커스 순교자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2015년 5월 18일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당시)에 레우벤 리블린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타미르 파르도 모사드 국장 등 이스라엘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유는 바로 엘리 코헨의 사망 50주년을 기념하고 그 유해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모사드 국장은 "이스라엘은 코헨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를 본국에 데려와 안장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고 힘주어 말했고 네타냐후 총리는 “오늘날 많은 어린이는 물론이고 거리 이름까지 코헨의 이름을 따고 있으며..... 그의 희생 덕택에 우리가 발을 뻗고 살 수 있는 만큼 반드시 그를 모국으로 데려와 안장하겠다.”며 엘리 코헨을 기렸다. 아마 저승에서 리하르트 조르게는 엘리 코헨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래도 자네는 행복한 스파이 아닌가.”하고 치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첩보원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비신사적인 곳이다.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나를 속여야 하고 원래의 나를 철저히 임무 속의 나에 복속시켜야 임무 수행이 가능한 분야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조르게와 코헨 외에도 수천 수만 명의 스파이들이 그렇게 은밀한 업무에 뛰어들었고 허무하게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빼어난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 자신의 임무 완수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돈 때문에 동지들을 숱하게 팔아넘기기도 하고 이중간첩 노릇을 하며 양쪽에서 보상을 받다가 머리 양쪽에 구멍이 나서 저승길을 가기도 했다.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정보원이 돼 누군가를 감시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역시 자신도 모르게 수행하는 이들도 많았다. 동독이 소멸한 뒤 동독 국민들은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가공할만한 활동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슈타지 비밀정보원의 총인원이 얼마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최소 18만9000명에 이른다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인구 6명당 1명이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보도(영국 BBC방송)도 나왔다.” (조선일보 2010년 10월 1일자)고 하니 그 규모의 방대함과 동독 국민들에게 들이닥친 충격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한 번 손자병법으로 돌아가자. 손자는 그의 저서에서 별로 어울리지 않는 영탄조를 구사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미묘하고 미묘하다(微哉微哉)! 간첩을 쓰지 않는 곳이 없다(無所不用間)!” 당연히 한국에도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있었던 첩보전과 정보원들의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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