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군부와 국회까지 포섭한 북 최고의 간첩 성시백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09.0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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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서 손자는 간첩, 즉 정보원의 종류를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향간(鄕間), 내간(內間), 반간(反間), 사간(死間), 생간(生間) 등 오간(五間)이다. 향간은 적국의 주민을 활용하거나 적국의 주민으로 만들어 정보를 캐내는 간첩이다. 이른바 고정간첩.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바보 김수현과 그 일당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내간은 적국의 관리들을 매수하는 일이다. 삼국 시대 김유신은 조미압이라는 이를 백제 좌평 임자의 하인으로 들여보낸다. 향간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임자까지 포섭한다.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으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나라에 의지하고 우리나라가 망하면 내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소.” 여기에 임자가 응했다. 이로써 임자는 내간이 된다.

반간은 적의 정보원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또 김유신이다. 648년 도살성 전투에서 승부사 김유신은 이런 명령을 내린다. “오늘은 검문을 하지 마라. 백제에서 간첩이 올 것이다.” 경계가 풀릴 대로 풀린 상황에서 김유신은 응원군이 내일 아침 도착할 것이니 기어코 결판을 내리라 호령하고 다닌다. 백제군의 간첩은 이를 듣고 백제 진영에 전했고 지금 있는 신라군도 감당하기 힘든데 응원군이 온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백제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유신은 백제군을 쓸어 버렸다.

백제의 좌평 임자는 신라 김유신에게 포섭된 간첩이 됐다. 채널A <천일야사> 화면 캡쳐.

사간은 좀 불행한 캐릭터다. 우리 편이지만 일종의 ‘버리는 패’라고나 할까. 거짓 정보를 들고 가서 적들을 믿게 한 뒤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을 말한다. 전쟁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이들이다. 거짓 명령서를 휴대한 채 습격을 받아 죽는 배역들, 그래서 이쪽을 헛갈리게 만드는 배역들, 그들이 사간이다, 사간의 반대 개념이 생간, 즉 단기간 안에 적진이나 적의 영토에 침투하여 비밀을 빼 오는 사람들이다.

3천년 전에 살았던 손자는 현대적 개념의 스파이에 적용해도 하등 손색이 없는 간첩의 분류를 해 내고 있다. 첩보전은 이 모든 요소들이 망라되고 결합되고 동원되고 뒤섞이며 전개된다. 적국과 적국 사이는 물론 적국과 우방국 사이에서도. 2차대전 이후 가장 첨예하고 살벌하게 대립해 온 나라들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두 나라는 따로 정부를 세우기 이전부터 서로를 집요하게 증오했고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전쟁이라는 미증유의 참화를 겪은 뒤에도 상대방을 붕괴시키려는 전방위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치열한 첩보전이 수반되었음은 물론이다. 수많은 첩보원들이 상대방의 내밀한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 기를 썼고 다치고 상하고 감옥살이를 하거나 죽기도 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예를 상기해 보자.

한국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 하나를 들어 보자. 궁정동(宮井洞). 이 이름을 들으면 50대 이상의 한국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죽음을 당한 곳으로 기억할 것이다. 궁정동에는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안가(安家)가 있었고 그곳이 10.26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이 궁정동 안가에 또 하나의 걸출한(?) 암살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 이름은 염동진이었다.

염동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하고 비슷하다. 몇 년 전 히트를 친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맡았던 역, 독립운동가 출신이지만 고문에 못 이겨 밀정이 된 사람의 이름이 염석진이었다. 염석진은 염동진의 실명을 조금 비튼 것이다. 실제 염동진도 독립운동가였고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을 당한 뒤 밀정 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가 밀정이었다는 정확한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고 한다.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맡은 염석진은 실제 독립운동가 염동진을 모델로 했다. TV조선 <강적들> 화면 캡쳐

해방 전 임시정부 내무부장이던 신익희는 백의사(白衣社)라는 특수 행동대를 조직했다. 당시 중국의 지배자였던 장개석이 운용한 비밀 첩보 조직 남의사(藍衣社)를 본따서 만든 일종의 정보 기관이자 암살이나 테러 등도 불사하는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염동진(본명은 염응택)은 이 조직의 총책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활동했다. 앞서 말한 궁정동 안가는 바로 이 백의사의 총 본부였다. 2004년 9월 공개된 ‘실리 보고서’ (해방 후 한국 주둔 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에 따르면 백의사 조직은 ‘남한, 북한, 만주 전역과 중국 전역에 뻗어 있었다. (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이들의 대담한 활동은 38선을 넘나들었다.

소련 군정 하에서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굳혀 가던 김일성은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 수류탄 공격을 받는다. 백의사 조직원 김형집의 소행이었다. 소련군 장교가 화급히 수류탄을 집어들어 던지는 바람에 위기는 모면했지만 김일성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백의사는 김일성 암살에 실패한 이후 최용건과 김책 (북한의 명문대학 김책공대의 그 김책이다) 등 북한 요인들의 집을 차례로 기습하며 북한을 벌집 쑤신 듯 해 놓았다. 김일성의 외삼촌이자 기독교 목사로 ‘조선 그리스도교 련맹’을 만들어 김일성을 도왔던 강양욱 또한 백의사의 표적이 됐다.

1946년 3월 백의사 단원들, 최기성, 김정의, 이희두 등은 강양욱 목사 자택에 들이닥쳤다. 강양욱 목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그 큰아들과 며느리, 큰딸, 그리고 또 다른 아들 중매차 찾아온 손님들까지 총탄과 수류탄 세례를 받고 죽어갔다. 중상을 입은 큰 딸은 죽어가면서 “나는 아버지 때문에 죽는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강양욱은 목사로서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앞잡이가 된 가롯 유다같은 존재였고 북한에서 왕성한 세력을 지녔던 기독교인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백의사의 작전을 도왔던 현지 조직 역시 기독교인들이 그 중심이었다. 강양욱의 딸도 분위기를 읽고 있었으리라. 백의사 요원들은 당시 소련군 당국에 의해 고려 호텔에 연금돼 있던 조만식까지 찾아가 북한 탈출 공작을 벌였다고 한다. 그 조직망과 역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염동진은 무슨 이유에선지 맹인 행세를 했다. 실제로 일제 관동군의 고문을 받아 시력이 약화됐다는 말도 있으나 맹인 행세를 했다고 보는 이들이 더 많다. 검은 맹인 안경을 쓰고 천 리 밖 김일성의 목숨을 노린 스파이 대장.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또 무슨 이유에선지 피난을 거부하고 인민군에 체포됐다 그 최후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왜 피난을 가지 않았던 것일까.

정부 차원의 정보 조직이 아닌 백의사의 활약이 그 정도였다. 북한도 그 지경을 당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북한이 딱히 뭘 하지 않아도 남한은 남로당원들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남로당 계열에 의지하지 않은 독자적인 대남 공작을 조직하고 싶어 했다. 나이도 많고 일제 강점기 내내 견결하게 투쟁해 온 공산주의자 박헌영에게 ‘남조선 해방’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1930년대 이래 김일성의 의형제 (<중국인 이야기> 김명호 교수에 따르면) 였다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 주은래가 김일성에게 한 사람을 소개한다. (김일성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고도 한다) 바로 성시백 (1905~1950)이라는 사람이었다.

남북한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컸던 간첩 성시백. 그는 김일성을 도와 남한의 주요 정보를 빼내는 일을 했다. 국방TV 화면 캡쳐.

황해도 평산 출신이었던 그는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상해로 망명한다.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호종남(胡宗南) 사령관의 막료로 정향명(丁向明)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국민당 통치하의 서안지구 공산당 정보기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는 등 지하활동에 종사하였다. 이 일로 중국 수상을 지낸 주은래(周恩來)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35년 중경(重慶)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였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연안(延安)으로 갔다가 다시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한국민족대문화백과사전 중)

이 소개만 보아도 성시백이 정보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사실을 알 수 있다. 호종남이라면 장개석의 직계로 활약하던 국민당군 장군이다. 그런데 성시백은 그 휘하의 막료로 있으면서도 공산당 첩보 조직의 지역 총수로도 움직였던 것이다. 중국인들도 성시백이 조선인인 것을 몰랐다고 전한다. 이후 연안과 중경, 공산당의 근거지와 장개석 정부과 임시정부의 근거지를 오가면서 활동하면서 민족혁명당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통일동맹을 하여 만들어진 단체로 5당이 모여 결성)에도 개입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과도 인맥을 쌓았다. 김구나 김구의 심복이었던 엄항섭, 한국의 초대 국무총리가 되는 이범석과도 친분이 있었고 한국군 장군으로 맹활약하는 김홍일과는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였다.

1997년 5월 26일 북한 노동신문은 성시백의 남한 출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46년 11월11일,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한 신문은 이달 호에 “20여년간 해외에서 독립광복을 위하여 분골쇄신하던 정향명 선생 일행 서울착”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열혈청년 시절에 나라를 광복코자 황해를 건너갔던 정향명 선생, 해방 소식에 접하자 귀로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국에 의연히 남아 방랑하던 동포들을 모아 귀국을 종결짓고 떳떳이 환국했다.” 

정향명은 곧 성시백이었다. 그는 곧 북으로 올라가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회동하고 임무를 받아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장군님 말씀을 받고 보니 앞이 탁 트입니다.”고 했다는데 그걸 믿기는 어렵겠지만 성시백은 그가 김일성을 두 번째 만나러 북에 왔을 때 김일성이 감동할 만큼의 ‘사업’을 꾸려 왔다. 김일성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노인 변장을 하고 북한에 왔는데 김일성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역시 유능한 스파이였던 셈이다. 성시백의 보고에 신이 난 김일성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차려온 술상을 밤새 같이 하며 공로를 치하했다고 전한다. 북한의 노동신문이 밝히고 있는 성시백의 ‘혁혁한’ 공로는 이러하다.

“그는 괴뢰 국방부부터 사령부, 헌병대, 육군 정보국에 이르기까지 조직선을 늘리고 적군 와해공작을 벌였다. 괴뢰 정부, 경찰, 정보, 남조선 미군부대와 장개석의 영사관까지 정보조직선을 그물처럼 펴놓았다.”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은 성시백 특집기사를 실었다.

성시백은 남한에서 신문사도 경영했고 남북한 밀교역에도 손을 대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고 남한 각처에 스파이망을 구축했다. ‘반공 검사’로 유명한 오제도의 회고에 따르면 이승만은 처음에는 자신의 좌익 수사를 탐탁지 않아 했는데 성시백 일당을 체포한 뒤 그 이전에 있었던 장개석과의 극비 회담 내용이 간첩들에게 흘러들어간 것을 보고하자 자신에 대한 냉대가 풀렸다고 한다(동아일보 1976년 6월 24일, 5면 '오제도의 그때 그일들', 이승만 대통령과의 첫 대면). 즉 성시백의 정보망은 극비로 진행된 국가원수끼리의 밀담까지 탐지해 낼 만큼 남한 깊숙이 치고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도 그렇다. 1949년 5월 20일 프락치라는 러시아어 단어는 이 즈음 한국에서 2천만 모두에게 친숙한 단어로 부상한다. 검찰이 국회 소장파 의원 6명이 남로당 지령을 받아 외국군 철수촉구 건의안과 남북통일협상안을 제출한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추후 이 혐의자들은 13명으로 불어난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야릇한 것은 이들이 대개 반민특위 관계자 출신이거나 반민특위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을 열심히 뒤쫓았던 공안당국의 일원들 즉 헌병사령관 전봉덕, 시경국장 김태선, 사찰과장 최운하 등은 반민특위로부터 친일파 혐의를 받았으면서 동시에 이승만으로부터는 무한한 총애를 받은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이른바 특수공작원이라는 정재한이라는 여자에게서 나온다. 이 국회 프락치 의원들을 배후 조종(?)한 남로당원의 애인이었다는 이 여자는 그 음부 속에 암호문을 넣어서 월북하다가 체포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프락치 사건 재판 과정 내내 증인으로 호출되지만 재판정에 등장하지 않았고 한창 재판이 진행되던 그 해 겨울에 덜커덕 사형을 당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다.

이 정재한이라는 여자는 얼마나 덩치가 컸던지 그 음부에 “3월분 국회 공작 보고, 유엔한위에 진언서를 제출하는 투쟁보고서'를 비롯해 '암호해표' 등은 분량이 꽤 많아서 약 40∼50쪽에 달하는 장문의 문건” (국회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김정기) 을 감추고 다니는 괴력을 발휘했던 바, 재판 과정을 지켜본 미 대사관 직원 그리고리 헨더슨은 이 정재한이라는 여자 자체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래서 이 국회 프락치 사건이 당시 진보적 양심적 국회의원들을 좌익으로 옭아매려는 조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북한이 덜컥 이 조작설을 전면 부인해 버렸다.

“국회 안에서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국회 부의장과 수십 명의 국회의원을 포섭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외군 철퇴요청과 평화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 넣었다”(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며 이 역시 성시백의 공작이었다고 선언한 것이다(월간조선 2013년 5월호, 주한미군의 철수와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에게 찾아와 김일성의 특사를 자임하며 김구의 평양행을 일궈낸 것도 성시백이었고 한국군의 흑역사라 할 2개 대대 월북사건도 성시백의 공작이었다고도 한다. 월북을 주도한 두 대대장 표무원과 강태무가 남로당 출신이라면 씨를 말렸던 숙청의 바람을 피해 오래도록 장수하면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총애를 받으며 편안히 생을 마친 것을 보면 그들은 남로당이 아니라 성시백 계열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을 훑어 보면 북한의 성시백 관련 주장들에 ‘영웅 만들기’를 위한 과장이 섞여 있다고 쳐도, 성시백의 영향력은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 말로는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보다도 뛰어났다고 할 정도로.

언론에 발표된 성시백 간첩 사건. 1950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

 

1950년 5월, 성시백은 112명의 조직원과 함께 남한 당국에 체포됐다. 이른바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사건’이다. 그 한 달 뒤에 전쟁이 터졌고 성시백은 이주하 김삼룡 등 남로당 거물들과 함께 총살당한다. 하지만 체포됐던 조직원들은 대개 풀려나 월북하거나 자취를 감춰 버렸고 성시백의 방대한 스파이망의 실체는 전쟁의 포화와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버렸다. 실제로 남로당 계열은 전쟁 이전의 모험주의적 봉기 와중에 대부분의 조직이 와해됐고 전쟁 때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 등으로 절멸됐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성시백 계열의 간첩망은 정확히 파악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전쟁 발발 당시의 수상한 정황을 들어 남한 당국의 핵심부에 간첩망이 기동하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북한의 남침이 임박한 상황에서 부대 이동이 잦아 현지 적응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거나, 비상 경계 태세를 계속 유지하다가 전쟁 직전 그걸 풀어 버려 장병들 상당수가 휴가를 나갔다거나, 주공 루트였던 의정부 방어를 맡았던 7사단의 공병대장 최정훈 소령이 ‘6월 25일 오전 9시’에 결혼식을 올린다며 장교들을 서울로 불러올렸다가 행방불명이 됐고 그 외에도 수상한 장교들의 행적이 많았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공포의 잔상은 오래 남았다. 1958년 11월 12일 경향신문(대남간첩 지휘망을 파악 전국정보기관서 내사중 기사)은 남한 정보기관들이 간첩망을 내사 중이라는 보도를 하면서 “남로당 계열의 공산분자는 95%의 검거율을 보였으나 북로당 및 중공당 계열의 성시백 계열은 1차로 116명만을 검거했기에 검거율은 30퍼센트에 불과”했으며 그 잔당들이 간첩의 핵심층을 이루고 암약 중이라는 남한 당국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손자의 5간으로 돌아가 보자. 격동의 남북 현대사에서 남이나 북이나 제 2의 ‘백의사’를 꾸리고 제 2의 성시백을 꿈꾸며 꾸준히 쌍방 내부에 정보망을 구축하는 향간(鄕間) 공작을 펼쳤을 것이다. 동서교류사의 권위자로 필리핀 국적의 레바논인으로 위장하고 살았던 무하마드 깐수 (이분은 전향하여 학문의 길을 걷고 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라든가 말레이시아 국적으로 서울 강남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며 남한 주사파 조직에 접근했던 진운방처럼. 또 북한이 ‘남한의 간첩’이라고 숙청했던 허다한 인사 가운데에는 남한에게 매수되거나 포섭된 내간(內間)이 있었을 것이고, 남한 경찰에서 치안국 경무과장까지 지냈던 김정제처럼 북한이 가동한 내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흑금성처럼 이중간첩 취급을 받은 이들 뿐 아니라 실제로 남북한 사이에 펼쳐진 칼날의 바다를 유영하며 이용하고 이용당했던 반간(反間)도 숱했으며 적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기 위해, 또는 정보 당국의 무모한 작전으로 희생당한 사간(死間)도 엄청났으며 정보를 얻고자 상대방 지역 깊숙이 침투하여 정보를 캐내 귀환에 성공한 생간(生間)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1999년 북한 영변 지역에 침투하여 흙과 물을 채취하여 귀환, 그 방사능 오염 상태를 통해 북한의 핵 개발 상황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던 남한 정보사령부 요원이나 1996년 강원도 일대를 뒤집어 놓고 숱한 인명 피해를 남긴 채 북한으로 귀환에 성공했던 북한의 침투조들처럼 말이다.

스파이 영화를 즐겨 보고 그 스릴 넘치는 스토리에 열광하는 것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지만 사실은 영화보다 더 교묘하고 훨씬 잔인하며 상상을 넘어설 정도의 첩보전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간첩을 운용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정보기관을 활용하지 않는 국가도 없다. 일반 국민들이 그 내막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 보통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하는 말들에 좌우되는 정보기관이라면 문을 닫는 게 낫지 않겠는가. 단 그들이 간첩이 아니라 내부의 국민을 상대로, 권력의 수족이 돼 무고한 이들을 족쳤던 역사, 민주공화국의 정보기관으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을 팽개쳤던 과거, 맹색 정보기관으로서 적의 간첩과 공작에 맞서야 할 인력들이 '문재인 나빠요 빨갱이에요' 하는 댓글이나 달고 있었던 전력만큼은 명확하게 기억하고 감시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정보기관은 무능하며 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돈만 잡아먹는 밥벌레 같은 정보기관만큼 국가와 사회의 해악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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