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은 없(었)다

  • 기자명 김재인
  • 기사승인 2018.09.0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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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일 대표의 권유로 ‘팩트체커’ 활동을 해 보기로 마음먹은 건 꽤 되었습니다. 하지만 철학 영역에서 팩트체크 거리가 있을까 하는 고민 때문에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물론 최근에 연구하고 있는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에 대해 써볼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본령이 철학이다 보니 최소한 첫 글은 철학을 주제로 삼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게다가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은 벌써 고수가 계시고.

철학은 본래 ‘팩트(사실)’를 다루는 영역은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가치’를 다룬다고 해야 할 겁니다.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아름답고 추하고 등의 문제가 철학의 본령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을 다루는 일은 이미 개별 학문 분과로 세분되어서 이미 철학이 따라가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 쪽에서 팩트체크를 한다는 건 참 역설적입니다.

방금 전 문단을 읽은 어떤 철학 연구자는 당장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철학의 본령이 가치를 다루는 일이라고? 이런 반론이 나오는 까닭은, 이미 철학 내부에서도 상당한 분과화가 이루어져서 마치 물리학자가 생물학자 하는 일을 잘 모르는 것과 비슷하게 논리철학 연구자가 미학을 잘 모르는 식의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이 무엇이다를 규정하는 일부터가 논쟁거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의 팩트체크 코너를 아예 ‘논란 일으키기’로 만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표님과 아무 상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가 이 기사를 본다면, 이런 취지가 승인되었다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업계 내부에서는 다 알지만, 외부의 일반인은 모르는 일들을 한 번 까발려 보는 거지요. 이런! 민감한 문제를 건들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업계의 팩트를 체크한다고 보면, 그 나름으로 코너의 취지에 부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르네상스 시대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가 바티칸 교황의 개인 서재에 그린 아테네 학당. 정 가운데 왼쪽 붉은 옷이 플라톤, 오른쪽 푸른 옷이 아리스토텔레스로 추정된다.

‘동양철학’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당연한 걸 왜 질문하느냐고요? 왜냐하면 ‘철학’은 19세기 중엽에 일본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말은 메이지(明治) 시대의 일본 사상가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가 처음 쓴 말입니다.

니시는 1861년에 이렇게 적습니다. 전래된 서양 학문 중에서 “격물, 화학, 지리, 기계 등 여러 분과에 대해서는 그것을 궁구하는 사람이 있지만, 오직 希哲學(희철학)(필로소피) 한 분과에 대해서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 ‘희철학’이라는 말은 필로소피(philosophy)의 번역으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철학자가 먼저 생기고 철학이 나중에 생겼다

영어 필로소피의 어원은 희랍어(고대 그리스어)인 필로소피아(philosophia)의 번역인데, 필로소피아는 플라톤이 만든 필로소포스(philosophos)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파이드로스여, 누군가를 지혜 있다고 일컫는 것은, 내가 보기엔 너무 높이 올라간 것 같고 그런 말은 신에게나 적용하면 적절한 것 같네. 그러나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 또는 그 비슷한 말로 일컫는다면, 그 자신도 차라리 동의할 것이고, 보다 더 합당할 것 같네.” 그러니까 사람들이 흔히 (잘못) 짐작하는 것처럼 ‘철학’이라는 분과가 먼저 있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지혜를 사랑하는 자’ 또는 ‘지혜의 친구’가 먼저 있었고 그 후에 그의 활동[필로소페인(philosophein)]이 있은 후, 그 활동을 가리키는 명사로서 필로소피아(philosophia)가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철학 입문서에는 ‘철학’의 어원은 ‘필로소피아’로,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와 ‘사랑한다’는 뜻의 ‘필로(philo-)’가 합쳐진 말이라고 설명되곤 하는데, 그럴듯하지만 잘못된 설명입니다.

(이처럼 이른바 ‘철학자’가 먼저 생겨나고 나중에 그의 활동으로서 ‘철학’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데 흥미로운 단서가 됩니다만, 이 주제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니시는 『시경(詩經)』에 처음 나온 글자인 ‘哲(철)’에 주목했습니다. 『시경』에는 “이미 밝고 또 지혜로워서 그의 몸을 보존한다(旣明且哲 以保其身)”라는 문구가 있는데(줄여서 명철보신ㆍ明哲保身), 여기에서 따온 것이지요. ‘希(희)’는 ‘갈구하다’, ‘바라다’라는 뜻이고, ‘哲(철)’은 ‘밝다’, ‘지혜롭다’는 뜻이니, 필로소피아의 번역으로는 제법 그럴듯합니다. 네덜란드 유학(1862~63)을 마치고 돌아온 니시는 1866년 전후로 교토에서 행한 강의를 정리한 책 『백일신서(百一新論)』(1874)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敎의 방법을 세우는 것을 필로소피[ヒロソヒ], 번역하여 哲學이라 명한다.” 이제 ‘希哲學(희철학)’은 ‘哲學(철학)’으로 대체되며, 필로소피아의 본뜻을 얼마간 잃게 됩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가장 앞에서 던진 물음은 이렇게 바뀔 수 있을 겁니다. 동양(동아시아)에도 서양의 필로소피아에 해당하는 활동이 있었나? 동양에도 철학이 있었느냐는 물음은, 투박하게 표현하면 ‘서양의 philosophia = 동양의 ( )’에서 ( ) 자리에 오는 것이 뭔가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은 다음의 물음으로 연결됩니다. 서양의 philosophia가 갖는 의미 내용에 상응하는 의미 내용을 갖는 동양의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게다가 우리는 ‘동양철학’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아무 의문 없이 사용합니다. 제도를 보더라도 철학과에서는 ‘동양철학’, ‘한국철학’, ‘중국철학’, ‘인도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도라는 것이 학문 분과에 대응한다면, 뭔가 있어야 가르칠 것 아닌가요?

哲學(철학) vs 理學(리학) 필로소피 번역 경쟁

이번 글에서 이 물음들에 다 답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대신 ‘철학’이라는 말을 발명한 니시의 입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사실 니시가 처음 번역어로 염두에 두었던 용어는 ‘希求賢學(희구현학)’이라는 의미의 ‘希賢學(희현학)’이었습니다. 이 말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쓴 주돈이(周敦頤)의 구절을 모방해서 만든 겁니다. 그렇긴 해도 니시는 주돈이의 ‘希(희)’에 주목했지 ‘賢(현)’은 피하려 했습니다. 그 까닭은 ‘현’이라는 표현은 한자문화권에서 성리학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시는 ‘希哲學(희철학)’이라는 표현을 낙점했던 겁니다. 나아가 더 깊은 고민 끝에 ‘희’마저 버리고 ‘哲學(철학)’이라는, 필로소피아 본래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용어로 옮겨갑니다. ‘희’라는 말이 여전히 성리학을 비롯한 전통 한학(漢學)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사실 전통 한학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필로소피의 번역어로 ‘理學(리학)’이라는 강력한 후보를 밀었습니다. 이들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 사이의 연속성에 주목하고 이를 옹호하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필로소피의 번역어를 놓고 동양파와 서양파 사이의 일전이 있었고, 니시는 서양파의 선두 주자였다고 보면 됩니다. 니시는 필로소피와 동양사상 간의 그 어떤 연관성도 제거하려 했고, 그 결과 등장한 번역어가 ‘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1877년 도쿄대학이 설립되며 문학부의 한 과가 ‘사학·철학·정치학과’로 명명되면서, 더 나아가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등이 간행한 철학 사전인 『철학자휘(哲學字彙)』(1881)가 출간되면서, 판세는 서양파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동아시아 전통에도 철학이 있었을까요? 동양철학이 있었을까요? 적어도 니시의 고민에 따르면 동아시아에는 철학이, 철학에 대응하는 그 어떤 활동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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