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조감독의 치열한 삶과 죽음, 그리고 와카마츠 프로덕션의 '부활'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10.0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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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현의 인터뷰] <아무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

‘운명’이라는 단어를 즐겨 쓰지 않는다.

인간 자주성의 포기를 전제하는 개념 자체도 영 마뜩찮지만,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예상되는 소프오페라(soap opera)에서 구태의연한 전개를 정당화하는데 남용된 사례가 셀 수도 없어서다.

하지만 적어도, 두 편의 작품(<고독한 늑대의 피><써니를 찾아서>)이 지난 7월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고, 그 중 <고독한 늑대의 피>가 EFFF(European Fantastic Film Festivals Federation) 부문 심사위원 특별 언급이라는 성과를 올린 지 석 달 만에 <아무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로 다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 사내, 시라이시 카즈야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는 쉽지 않다. 

설명을 위해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아이치 현 나고야 시의 한 허름한 바로 돌아가 보자. 평생 아이치를 벗어나 본 적 없다던 마스터가 필자에게 자신이 한국영화의 오랜 팬이라는 사실을 자랑하다 놀랍게도 80년대 뉴웨이브의 기수 이장호의 이름을 언급했다. 한류는커녕 한국 관련한 화제라면 잘해야 고 김대중 대통령 납치 사건 정도였다던 그 시절. 영하의 날씨에 거리를 배회하던 마스터는 영어와 라틴어가 조합된 낯선 간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시네마 스콜레(Cinema Skhole.‘영화 학교’),

마스터는 생전 처음 보는 한국 영화에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을 연기하는 한 여배우에게 매료되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이장호 회고전에서 상영될 1983년 작 <과부춤>의 히로인, 이보희다.

몇 년 전까지 러브호텔이었던 건물에 관객과의 소통에 목말라하는 청년영화인들을 위해 1983년 개관한 50석 규모의 이 미니씨어터(mini theatre)는 그해 연말 서른 네 살의 재일교포 감독 최양일의 데뷔작 <10층의 모기>를 상영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북한과 구소련, 한국에서는 ‘중공’이라 불리던 수교 이전의 중국, 그리고 인도의 영화까지 공개한다. 국경의 구분도, 사상의 제약도 없었다. 이 해방구에 사재를 털어 넣은 이는 당시까지 무려 29편에 이르는 자신의 영화를 연출하고, 15편이나 되는 후배들의 영화를 제작한 독립영화계의 대부 와카마츠 코지였다.

와카마츠 감독은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받았고, 며칠 후 사고로 불꽃같은 삶을 접었다. 그리고 당시 “부산영화제에서 찍은 사진과 핸드 프린팅 동판도 전달하지 못했는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망연자실해 했던 아시아 영화 담당 프로그래머 김지석도 결국 5년 뒤 불의의 사고로 우리의 곁을 떠났다. 

이렇듯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의 초청은 위에서 언급한 한국과 일본의 세 영화인들과 실로 ‘운명’이라 부를 만한 접점을 가지고 있다. 

시라이시는 마지막까지 와카마츠의 곁을 지킨 제자이며,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는 영화계에서 성공에 정점에 서게 된 그가, 스승의 급서로 스러진 불씨를 되살린다며 아직도 영화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는 선배와 동료, 그리고 막 그 꿈을 꾸기 시작한 후배들과 함께 ‘와카마츠 프로덕션 재시동(再始動)’을 선언하며 내놓은 1호 작이다. 그리고 핑크영화의 외피를 쓴 작품들로 보수ㆍ기득권 세력을 비웃고, 표현의 자유와 인디스피릿의 수호자로 평생을 살았던 스승의 삶을 그가 가장 신뢰하고 아끼는 제자이자 동료, 그리고 시대의 정점, 혹은 선두에 서 있었던 여성인 실존인물 요시즈미 메구미의 시선을 통해 그려낸 이 영화는, 위에서 등장한 고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지석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 뒤로 와카마츠 감독의 생전 사진과 부산국제영화제 핸드프린팅 동판이 보인다. 와카마츠 프로덕션 제공.

 

홍상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폐막 3개월 만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왔다. 이 영화제에서는 당신의 장편 데뷔작 <도쿄의 실낙원>(2009)이 뉴 커런츠 부문에서 상영된 바 있다. 한국의 영화제에서 이렇게 사랑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라이시 카즈야:

개인적으로 늘 기존의 일본영화들과 다른 영화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개성을 한국 분들께서 좋게 봐주시는 것 아닐까. 한국 분들은 저마다 사회의 모습을 명확히 표현해내는 영화를 볼 줄 아는 소양을 가지고 계신다. 이는 일본 관객들과의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홍상현: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의 주인공 와카마츠 코지 감독은 6년 전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수상하시고 영화제가 폐막한지 나흘 뒤에 돌아가셨다. 더욱이 당신의 작품이 노미네이트된 상은 당시 와카마츠 감독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했던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시라이시 카즈야:

와카마츠 코지 감독을 잃은 것은 우리 제자들뿐만 아니라 아시아 영화계의 커다란 손실이기도 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님의 서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가 김 프로그래머님을 기리는 상에 노미네이트되니 마치 두 분을 다시 뵙게 된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 김 프로그래머님과의 수많은 추억도 떠오르고.

 

홍상현:

와카마츠 감독은 숨 막히는 일본 사회에서 제도와 관습은 물론, 일체의 사상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살았던 분이셨다고 생각한다. 돈키호테나 도어즈(The Doors)의 짐 모리슨, 혹은 체 게바라처럼. 당신에게는 스승이기도 한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화 하나만 들려줄 수 있겠나.

시라이시 카즈야:

당신은 자유로운 분이셨지만 늘 모든 이들의 슬픔을 짊어지시는 면 또한 갖고 계셨다. 또,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게 있는데, 바로 권력의 편에서 사물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은 당신의 영화에 경찰이 등장하는 상황에 몰입한 나머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까지 보이셨지. (웃음)

 

홍상현:

<흉악>(2013)으로 “젊은 명장(名匠)”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게다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고독한 늑대의 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대작이기도 했는데,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를 ‘인디작가’로 소개한다. 그토록 일관된 '반골정신'을 유지하는 감독도 드물 거다.

시라이시 카즈야:

인디에서 해 온 작업들이 평가를 받아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메이저 스튜디오의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영화제작의 방법론까지 바꾸면 내가 영화를 할 이유가 사라질 뿐이다. 스스로 이 점을 잊지 않기 위해서 더더욱 나 자신을 인디작가라고 말해왔다.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 역시 이 인디스피릿을 다시금 선언한 작품이고.

 

홍상현:

“풍운아”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시라이시 카즈야:

그런 이야기들도 하는구나. (웃음) 아마도 나와 같은 출신들 중에 영화감독이 된 이가 별로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의 한 장면. 와카마츠 프로덕션 제공.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의 한 장면. 와카마츠 프로덕션 제공.

홍상현:

감독으로써의 전성기를 맞은 지금 2013년 이후 와해되었던 와카마츠 프로덕션의 재시동을 선언하고 그 1호 작품으로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를 내놓았다. 와카마츠 프로덕션은 황금기를 구가했던 일도 있지만 끊임없이 당국의 제재에 시달리며 엄청난 재정적 압박에 시달린 경험도 있다. 어쩌면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1969)같은 결말을 맞을 수도 있는 무모함이다.

시라이시 카즈야:

다시 시작한 건 다행이지만, 이 움직임이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뭐 어떤가. 후배들 중에도 아직 데뷔를 하지 못한 이들이 많으니 그들이 내 뒤를 이어줄 수도 있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저 계속 작품을 만들 수 있기만 바랄 뿐이다. 일단 <내일을 향해 쏴라>처럼 멋지게 끝을 맞고,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홍상현: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는 와카마츠 감독도, 제자 그룹의 맏형인 아다치 마사오 감독도 아닌 ‘여성’ 요시즈미 메구미 조감독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굳이 그녀의 시점에서 영화를 그려낸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라이시 카즈야:

‘그녀야말로 진정한 나의 모습을 투영시켜주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살았던 시대도, 성별도 다르지만 같은 스승의 제자로 입문해 조감독 생활을 하며 필사적으로 영화에 매달리던 모습은, 바로 내 청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그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말을 머뭇거렸다) 나는 운이 좋았던 까닭에 감독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어쩌면 그녀와 같은 끝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단언컨대 그녀의 존재는 이 영화의 전부다.

 

홍상현:

영화의 이야기는 68혁명의 영향으로 일본사회가 가장 크게 동요했던 1969년에 시작된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그녀가 요절로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끝이 난다.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함에 있어 당신이 가장 주목한 부분은 무엇인가.

시라이시 카즈야:

당시는 일본의 근대사 가운데서 가장 많은 민중이 정치와 마주했던 시절이다. 와카마츠 프로덕션도 그 일익을 담당하며 정치와 정치에 뛰어드는 민중의 모습을 성, 또는 폭력을 매개로 한 전위적인 묘사로 그려냈다. 이는 오늘날의 일본영화에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홍상현:

불꽃처럼 빛나는 나날을 뜨겁게 살아갔던 영화청년들의 모습을 그려낸 당신의 연출에서 지금은 사라져버린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아(nostalgia)가 느껴진다.

시라이시 카즈야:

확실히 그런 그리움은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젊은이들 가운데 여전히 “무엇인가 되고 싶다”는 뜨거운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또한 그런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모여 치열한 논의 속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성장해 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내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의 한 장면. 와카마츠 프로덕션 제공.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의 한 장면. 와카마츠 프로덕션 제공.

홍상현:

하지만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는 온갖 난관 속에서도 꿈을 꾸고, 벼랑 끝에 서게 될 지라도 쉼 없이 질주하는 ‘영화장이’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1960ㆍ70년대의 일본이라는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평범한 생활인들이 위화감을 느끼기 쉬운 ‘필름메이커 영화’를 극복하는 포인트가 있다는 이야기다.

시라이시 카즈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쁘다. 바로 그 ‘멈추지 않는’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고, 다가올 미래에 내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이다.

또한 이 영화는 ‘영화장이’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에게든 뭔가에 끊임없이 매달리는 특별한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

 

홍상현:

엔딩 크레디트가 흐를 때 이 작품으로 당신의 인생도, 영화도, 하나의 전기를 맞이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가 당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갖는 의의와 앞으로의 구상에 대해 말해 달라.

시라이시 카즈야:

어떤 영화를 만들든 나만의 자세를 바꿀 생각은 없지만, 어떤 각오로 영화를 만들어 갈 지와 관련해서는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아무 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는 내게 매우 소중한 작품이다. 처음 연출해본 '청춘영화’이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참으로 신기한 것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극중에서 자신의 스승, 와카마츠 감독을 연기하는 배우, 이우라 아라타와 마주앉아 삼계탕 한 그릇부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시라이시 감독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기라성 같은 세계의 감독들이 집결하는 아시아 최대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게 될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편안함. 

하지만 이내 결코 이상하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는 돌아온 것이었다. 어머니가 일하던 홋카이도의 밥집에 한 장의 포스터와 함께 건네진 영화표가 꿈의 시작이었던 영화청년을, 넓은 가슴으로 품어주었던 두 거인, 와카마츠 코지와 김지석의 가장 빛나던 시간이 잠들어있는 고향, 부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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